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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2일 개봉 후 누적관객수(23.11.29일 기준) 236명을 돌파하며 박스오피스 1위, 관람객 평점 9.56을 넘어서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이 영화를 관람 한 사람들의 소문에 따르면 '화가 나지 않을수 없는 내용의 영화', '역사를 다시 배우게 되는 영화'라는 극찬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영화 서울의 봄의 모티브가 된 12.12 군사반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정리를 해보려 한다.
목차
1. 10.26 사태란?
2. 12.12 사태가 일어난 원인
3. 쿠데타 이후의 상황
4. 영화 서울의 봄
10.26 사태란?
12.12 군사정반란에 대해 알기 전 1979년에 발생한 사건인 10.26 사건이 중요한데 10.26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사망한 사건으로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 한 것이라 진술했고 사건 발생 이후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의 자리가 모두 공석이 되자 최규하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한 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2.12 사태가 일어난 원인
그런데 당시에는 전국 비상계엄 선포는 총 책임을 대통령이 맡게 되지만 부분 계엄 선포를 하게되면 총 책임이 국방부 장관이 되기 때문에 최규하가 '제주도를 제외한' 계엄선포를 했던 당시 권력은 계엄사령부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로인해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있던 전두환이 10.26사태의 수사 총책을 맞게 되었고 그 와중에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최규하는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해 전두환이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고 이때문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전두환은 숙청 대상 1호 였다.
- 최규하가 정치에 무관심했던 것은 개인적 생각이 아닌 실제로 권한대행 당시 정승화가 계엄사의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냐 묻자 지금은 전국 계엄이 아닌 부분계엄이니 자신에게 보고하지 말고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라 지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당시 이미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들을 주력으로 모인 군내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에 포함되어 서로 상부상조 하며 군 내의 굵직한 자리를 하나씩 맡고 있던 중인 데다가 차지철, 김재규가 동시에 무력화 되며 사실상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정보기관이 보안사 밖에 남지 않게되었고 정보력 또한 국군보안사령부로 집중되어 전두환의 세력은 점점 강화되었다.
또한 전두환은 10.26사태 다음날 수사를 빙자해 윤일균 중앙정보부 1차장 겸 부장 직무대리, 오탁근 검찰총장, 손달용 치안본부장 등을 보안사로 불러들여 자신에게 협조하면 체포하지 않겠다 말하며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그로인해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군검찰 등의 모든 정보 수사기관들을 지휘, 통제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이용해 비리를 캐내거나 자신에게 불리한 수사내용을 임의로 편집해 보고하는 등의 행동을 일삼았다.
전두환의 만행은 정승화 계엄사령관 에게 보고되었고 정승환은 전두환에게 '당신은 군인이지 정치인이 아니다' 라는 발언을 할 정도였고 비슷한 시기에 전두환은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을 조사하던 중 김계원의 집에서 9억원 가량의 수표가 나오자 박근혜에게 6억원, 노재현 육군참모총장에게 5천만원을 주고 정승화에게 2억을 전달하려 했다.
정승화는 이런 전두환의 태도에 화가나 노재현에게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 주장했지만 이미 뇌물을 받은 노재현은 전두환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승화는 계속해서 전두환의 처벌을 요구하며 특히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군 기강을 망치고 있따는 생각에 인사개편을 통해 하나회 장교들의 기세를 꺾으려는 계획을 갖기 시작했다.
이에 정승화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직에서 쫓아내기 위해 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의 보직 이동을 계획하고 당시의 국방 장관이었던 노재현과 상의를 했고, 당시 청렴 군인으로 평가받던 장태완 솓장을 수도경비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하나회의 인사들을 핵심부서에서 밀어내고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한 조치를 감행했다.
하지만 노재현 국방장관은 전두환의 보직 이동 계획에 대해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알렸고, 김용휴는 이 사실을 전두환에게 알려 그냥 당할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전두환은 정승화를 10.26 사건 현장에 있었던것을 구실로 정승화가 김재규와 한패였다는 주장을 하며 체포할 구실을 만들었고 하나회 조직원들과 모여 12월 12일에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의했다.
드디어 1979년 12월 12일 저녁이 되고 하나회의 주요 지휘관들은 준비를 마친 뒤 당시 장세동 보병대령이 단장이던 수도경비 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 했고 작전명을 '생일 집 잔치'라 칭하며 원래는 참모총장 곤관에서 정승화를 납치해 합수부로 데리고 감과 동시에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아 체포 행위를 합법화 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승화의 체포 의도가 정승화에게 알려질 수도 있고, 그렇다면 반격을 당할수도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은 법적 처벌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 안에 있었고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는 전두환의 직속 상관이 되기 때문에 군 지휘체계상 당시 계엄사령관보다 위에 있었던 국방장관, 대통령 에게 허가를 받아야 정승화의 체포가 합법이 되는 것이었고 긴박한 상황에 놓여있던 정승화는 버스에서 내린 33헌병대원들에게 정문을 장악 당한 뒤 허삼수, 우경윤이 정승화에게 동행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승화는 대통령의 연행 승인 재가가 있는지 확인을 한다며 이재천 육군 보병소령 에게 전화로 확인하라 했고 이재천이 청와대에 전화를 걸려 하자 합수부 장교가 총을 발사해 이재천은 총상을 입게 되 그때부터 총격전이 이어지다가 결국 정승화는 연행된다.
- 이때 33헌병대를 직접 지휘해야할 우경윤 헌병대령 또한 중상을 입고 요란하게 정승화가 연행되 아무 지시도 받지 못한 채 공관에 남겨진 33헌병대원들은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스스로 철수하고 버스에 탑승했다고 한다.
쿠데타 이후의 상황
위 내용 이후에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지만 결국 이 사건 이후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고문을 당한 뒤 불명예 제대를 당한것도 모자라 10.26 사건 당시 김재규와 쿠데타를 공모했다느 죄목으로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총 17계급을 강등당했다.
- 전두환이 백담사로 들어간 뒤 대장으로 복권되며 1987년 대선에서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취임해 김영삼의 추격전에도 일조했다.
또한 이후 전두환이 육사 11기인 자신보다 윗기수인 육사 5~8를 대대적으로 전역시키고 자신에게 비 우호적인 세력들을 좌천시키며 하나회와 전두환은 실권자가 되었고 이후 5.17 내란과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며 꾸역꾸역 대통령이 되었다.
영화 서울의 봄
지난 11월 22일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은 위에서 설명했던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을중심으로 일어난 군사 반란에 대한 사건을 다룬 영화로
- 수도경비 사령관 장태완 ▶ 이태신(정우성)
- 계엄사령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 정상호(이성민)
- 특전사령관 정병주 ▶ 공수혁(정만식)
- 김진기 육군 헌병감 ▶ 김준엽(김성균)
- 최규하 대통령▶ 최한규(정동환)
-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 ▶ 전두광(황정민)
- 당시 9사단장 노태우 ▶ 노태건(박해준)
- 보병대령 장세동 ▶ 장민기(안세호)
-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화평 ▶ 문이평(박훈)
이 역할을 맡아 내용을 이끌어 갔다. 영화는 팩트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관람한 사람들 모두가 역사적 사실에 분노했고 생각 외로 쿠데타 과정이 허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대한 대처또한 미흡했다는 사실에 허탈해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가 끝난 뒤 워치를 이용해 자신의 심박수를 업로드하는 '심박수 챌린지'가 이어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150-170까지 인증을 해 영화에 대한 짧고 명확한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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